2021년은 광명이 시로 승격되어 40년을 맞는 해이다. 광명은 고구려 시대에 잉벌노현, 고려시대에 금주현, 조선시대엔 금천현⤏시흥현⤏시흥군으로 불리다 1981년 7월 1일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개청 40주년을 맞아 원래부터 광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성씨들을 찾아 그들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광명이 지금처럼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전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유난히 집성촌으로 부락을 형성하여 덕수 장씨, 여흥 민씨, 순창 설씨, 수원 백씨, 창녕 성씨, 금녕 김씨, 밀양 손씨, 파주 염씨, 금천 강씨, 광산 김씨, 김해 김씨, 충주 평씨, 무송 윤씨 등이 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아보는 성씨는 금천강씨(衿川 姜氏)다. 금천(衿川)은 관악구,금천구,과천시,광명시,군포시 일대를 통괄하는 옛 지명으로 금천 강씨(衿川 姜氏)는 금천구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금천 강씨의 시조 강여청(姜餘淸)은 신라 때 시흥군(始興郡)으로 옮겨와서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으며 4세손인 강궁진(姜弓珍)은 고려 건국에 왕건을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강궁진의 아들은 우리 역사에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과 함께 ‘3대 대첩(大捷)’으로 꼽히는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강감찬(姜邯贊)장군이다.
금처강씨 종중에서는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낙성대의 안국사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한 강감찬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제를 지내고 있다.
금천강씨가 광명에 터를 잡은 것은 한성판윤을 역임했던 16대손 강양이 낙성대에서 금천강씨 선산이 있는 기와집골(애기능 안쪽)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인조 때 강석기가 우의정을 역임하고, 그의 딸인 민회빈 강씨가 소현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큰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러나 인조24년인 1646년에 민회빈 강씨가 인조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몰렸고 일가족이 몰살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민회빈 강씨의 4형제와 자손들 및 노비들도 장살당하거나 사약을 먹고 죽게 된다. 그러나 강석기 집안의 계집종 하나가 관군들을 피해 강석기의 증손자인 강봉서를 등에 업고 충청도 광천으로 도망을 가 멸문지화를 면하게 된다.
이렇게 반역으로 금천강씨 집안이 몰리면서 금천강씨 선산에 있는 묘비들은 공적이 적혀 있던 글이 모두 지워졌고 지금도 선산에는 공적이 지워진 상태에서 뽑혀져 있는 비석들이 널부러져 있다.
이후 70년이 지난 1718년(숙종 44년)에 이르러 강빈은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되었고 충청도 광천에 살던 강봉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능말(능의 끝쪽)이라고 불리는 아방리이다. 아방리 일대는 전국에서 가장 큰 금천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금천강씨 대부분이 강봉서의 후손들이다.
아방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금천강씨의 후손 강기석씨는 온신초등학교가 지어질 당시 (전980평, 시가 800원)의 부지를 기부했고, 강기석씨의 후손들은 대부분 온신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오랜 시간 지역을 지키고 있다. 또 금천강씨 집안의 며느리인 국민의힘 김연우 시의원은 정치인으로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이렇듯 금천강씨는 광명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다른 성씨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 왔으며 모진 풍파를 겼으면서도 명맥이 끊기지 않고 견디어 온 성씨이다. 또 오랜 시간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성씨답게 많은 역사적 사료를 간직하고 있다. 민회빈 강씨의 묘인 영회원은 문화재관리청에서 몇 년 전부터 복원에 힘쓰고 있다.
또 민회빈 강씨 묘 근방의 강양에서부터 강석기까지 30기 정도의 묘가 있는 금천강씨 선산은 수도권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공적이 지워져 넘어져 있는 비석들은 역사적 사료로서 지역에서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향토학자나 정치인들의 관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