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래사회포럼(회장 김갑종) 정례회가 4월29일 오후6시30분 동부새마을금고 6층에서 있었다.
이날 회의는 광명 시민으로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광명의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또 광명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광명시청 문화관광과 양철원 학예연구사와 함께 하였다.
김갑종 회장은 인사말에서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일반적인 친목모임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임, 즉 지역사회의 발전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이익과 결부되지 않은 일에 자신의 열정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더 어렵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우리가 하는 것이다. 광명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하는 습관, 운동하는 습관, 연구하는 습관의 세가지 습관을 갖는 것이 자기의 삶을 개발하고 만들어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지역을 알아야 지역의 발전을 위해 연구할 수 있다. 광명의 역사를 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양철원 학예연구사는 강연에서 “►광명시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00년경부터 사람들이 정주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잉벌노현에 속했다. 그후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곡양현(穀壤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금주현(衿州)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태종 13년 8도제를 단행하며 금주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하였고 정조가 화성능행 시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다. 고종 32년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된 후 식민지시기인 1914년 시흥군이 9개면, 83개리로 편재되면서 광명지역은 시흥군 서면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때 통합의 과정을 거쳐 철산리,소하리,하안리,일직리,광명리,노온사리,가학리로 명명되었다.
►이후 1970년 6월 10일 서면 광명출장소 설치, 1974년 6월 1일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되었고 1979년 5월 1일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2016년 2월 현재 128,014세대, 344,128명, 18동 448통 3,116반으로 편재되어 있다”고 강의하였다.
강의 후 알차고 유익한 강의를 해준 양철원 학예연구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하였다.